한강 작가의 소설 흰 필사를 마쳤다
소설 흰은 흰 것에 관한 소설이다
시와 산문 그 어느 사이에 있는
호흡 짧은 글을 엮어 둔 문집 같은 소설이라
읽는 데도 필사를 하는 데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글을 써 보겠다고 마음먹고
처음 필사를 시작했을 땐
책 한 권을 필사하고 나면
희미하게나마 길이 보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책 두 권을 필사하고 난 지금도
여전히 모르겠다
세 권쯤 필사하면 한 발자국이나 나아갈까
아마 아닐 것이다
남의 글을 따라 쓰는 것도
글을 익히는 하나의 방법이나
그게 방법이 아니란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일단 홀로 약속한 대로
세 권까지는 필사를 해보기로 했다
책을 아주 느리게 읽는 것 자체로도 좋고
필사를 통해 어쩌다
단 한 걸음 떼기라도 하면 좋으니까
길을 걷다가
홀로 탐스럽게 핀 장미 한 송이를 보았다
그래 너도 덥지
나도 아직 반팔을 입고 다니는데
너라고 덥지 않을까
겨울에 피는 꽃을 처음 본 것도 아니고
웃으며 사진을 찍고는
그냥 지나갔는데
아닌척해도 수능 날엔
여전히 지나치게 감정적인 사람이 되는 걸까
사진첩을 보다가 문득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라는 말이 생각났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맞는 말이다
매해 수능 날은
얼마나 추울지를 미리 가늠할 정도로
춥기로 유명한 때지만
올해는 아직 매서운 추위가 오지 않았다
그래도 겨울은 겨울인지라
장미가 필 만큼 더운 날은 아닌데
새빨간 장미가 홀로 피어나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미가 피어야 할 때는
봄도 여름도 아닌
바로 지금이다
피어나야 할 때가 되었기에
낙엽이 지는 11월에 피어난 장미는
붉은 단풍 보다 더 붉고 탐스러워
주위를 둘러볼새 없이 급하게 걷던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수능 날인 오늘은
꼭 스타벅스에 가서 핫 초콜릿을 마시고 싶었다
캐럴이 들리는 추운 겨울
스타벅스에 홀로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창밖을 바라보며
핫초콜릿을 마시는 걸 좋아한다
내게 스타벅스는 아직도
친구와 함께 숙제를 하고
어떤 어른이 될지 꿈을 꾸던
다락방 같은 곳이다
나는 아직도 가끔
학창 시절로 돌아가서 수업을 듣고
수능을 보는 꿈을 꾼다
부끄럽지만
아직까지도 미처 가보지 못 한 길에 대한
미련과 후회가 남아있다
내가 일을 시작하고
정신없이 바빠진 무렵부터는
더 이상 수능철에 부는 차가운 겨울바람에
우울하지는 않지만
사실은 아직 이 의미 없는 우울감에서
완전히 해방됐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책상 깊은 곳에
오래 미뤄둔 숙제를 숨겨둔 기분이다
친구들은 이미 한참 전에 묵은 숙제릉 끝내고
새로운 과제를 풀어내고 있는데...
하지만
때가 늦은 것 같아도
그냥 묵묵히 피어나면 된다
겨울에 피어난 장미는
추위를 못 이겨 금방 얼고 시들지 모르지만
나 홀로 탐스럽게 충분히 사랑스럽다